'유해 가습기살균제' SK케미칼 前 대표 구속…과실치사상 혐의

성연성 2019-04-18 (목) 00:57 5년전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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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 성분이 포함된 가습기 살균제를 제조해 인명 피해를 낸 혐의를 받는 홍지호 SK케미칼 전 대표가 구속됐습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 사건의 핵심 혐의인 업무상 과실치사상으로 SK케미칼 관계자가 구속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홍 전 대표의 구속으로 애경산업 안용찬 전 대표 구속영장 기각으로 주춤했던 검찰 수사에 다시 힘이 실릴 것으로 보입니다.

임민성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어제(17일) 홍 전 대표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했습니다.

임 부장판사는 "현재까지 전체적인 수사 경과 등에 비춰 보면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으므로 피의자에 대한 구속 사유와 그 상당성이 인정된다"고 밝혔습니다.

홍 전 대표는 2002년 SK가 애경산업과 '홈크리닉 가습기 메이트'를 출시할 당시 대표이사를 맡아 의사결정 전반을 책임졌습니다.

이들 기업이 2011년까지 9년간 판매한 '가습기 메이트'는 옥시의 '옥시싹싹 가습기당번' 다음으로 많은 피해자를 낸 제품입니다.

검찰은 홍 전 대표와 함께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로 SK케미칼 전 직원인 한모, 조모, 이모 씨에 대해서도 구속영장을 청구했지만, 한 씨만 구속되고 나머지 직원에 대한 구속영장은 기각됐습니다.

임 부장판사는 "제품 개발·출시와 사업 인수 및 (제품) 재출시 과정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과정에서 피의자의 지위 및 역할, 관련자들의 진술 내역, 피의자가 수사에 임하는 태도, 현재까지 수사 진행 경과 등에 비춰 보면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다"며 한 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2명에 대해서는 구속 사유는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구속영장이 발부된 홍 전 대표는 가습기 살균제 원료물질에 대한 흡입독성 실험 등을 통해 안전성을 확인한 뒤 제품을 출시해야 하는 업무상 주의의무를 다하지 않은 혐의를 받습니다.

SK케미칼은 1994년 국내 최초로 가습기 살균제를 개발한 유공으로부터 2000년 가습기 살균제 사업 부문을 인수했습니다.

2002∼2011년에는 SK가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 방식으로 필러물산에 제조를 의뢰해 납품받은 가습기 살균제를 애경산업이 받아 판매했습니다.

유공은 1994년 첫 가습기 살균제를 출시하는 과정에서 서울대 이영순 교수팀에 의뢰해 흡입독성 실험을 했으나, 안전성을 담보할 수 있는 결과는 도출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검찰은 SK가 이 자료를 통해 인체 유해 가능성을 알면서도 추가 실험 없이 제품을 판매해온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앞서 검찰은 가습기 살균제 유해성 관련 자료를 은폐한 혐의로 박철 SK케미칼 부사장을 구속기소하고 수사를 진행해 왔습니다.

검찰은 지난해 말 가습기 살균제 피해 사건을 재조사하기 시작한 지 4개월여 만에 필러물산(2명), 애경산업(3명), SK케미칼(1명) 전·현직 임원 등 6명을 기소한 바 있습니다.

어제 홍 전 대표의 구속으로 지난달 법원에서 영장이 기각된 안용찬 전 애경산업 대표에 대한 검찰의 구속영장 재청구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습니다.

(사진=연합뉴스) 

박원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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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2부> 독립운동과 한국교회 (11) 제암교회와 제암리 학살 사건최용 제암교회 목사가 지난 15일 경기도 화성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의 순국기념비를 가리키며 이 자리에 1919년 불탄 제암리 교회가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지난 15일 오전 10시 경기도 화성 향남읍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 ‘4·15 제암리 학살사건 100주년 추모제’에 참석한 500여명의 성도와 시민들이 엄숙한 분위기 속에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순국기념관은 100년 전 일제에 의해 23명이 목숨을 잃은 제암리 교회 옛터 옆에 있다. 교회는 사라졌지만 아픔은 남았다.

1919년 4월 15일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 믿기 힘든 참상이 벌어졌다. ‘탕, 탕, 탕.’ 제암리 교회에 갇힌 21명의 주민에게 일본 경찰과 헌병이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교회는 초가집에 십자가를 올린 작은 예배당이었다.

일경은 열흘 전인 5일 발안장터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한 주민들을 가혹한 매질로 진압했다. 일경은 그날의 일을 사과하겠다며 마을에 나타나 15세 이상 남자들을 교회로 불러모았다. 영문도 모른 채 교회 문턱을 넘은 이들은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복음이 선포되던 교회가 한순간에 사지로 변했다. 사격을 멈춘 일경은 불까지 질렀다. 증거 인멸을 위해서였다. 불길은 삽시간에 초가를 삼켰다.

남편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두 여인이 교회 마당에 주저앉아 오열하기 시작했다. 일경은 슬피 울었다는 이유로 칼을 휘둘렀다. 이날 교회 안팎에서 23명이 목숨을 잃었다. 무자비한 폭력 앞에 유가족들은 침묵을 강요당했다. 현장을 목격한 주민들도 입을 열 수 없었다.

제암리 학살 직후 현장을 찾은 프랭크 W 스코필드 선교사가 촬영한 학살 현장 사진.

자칫 묻힐뻔 했던 학살의 참상은 사흘 뒤인 18일 현장을 찾은 프랭크 W 스코필드 선교사에 의해 전 세계에 폭로됐다. 일제는 우발적인 사고라고 발뺌했다. 주범인 아리타 중위를 재판에 넘겼지만 일본군사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진상은 다시 묻혔다. 일본 정부의 사과도 없었다. 고통은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 되고 말았다.

화성시는 2001년 학살 현장에서 200m쯤 떨어진 자리에 순국기념관을 세웠다. 기념관 2층엔 제암교회(최용 목사)가 세워졌다. 순국기념관엔 연간 10만여명이 방문한다. 최용 목사와 교인들은 제암리 학살의 참상을 후대에 알리는 메신저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강신범 원로목사도 순국기념관을 찾는 이들을 직접 안내한다. 학살 후 집단 매장됐던 피해자들의 유골은 1982년에야 발굴됐다. 수습한 유골은 제암교회 왼쪽 언덕에 합장했다.

최 목사는 “제암리 학살 사건 후 두 번째 희년을 맞았지만 달라진 게 전혀 없다는 현실이 아프다”고 말했다. 희년은 이스라엘에서 50년마다 선포하는 안식과 자유의 해를 의미한다. 제암리 학살이 일어난 뒤 100년이 지났음을 두 차례 희년으로 표현한 것이다.

“일본은 여전히 제암리 학살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과를 기대하는 건 무리죠.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일부라도 일본 학생들이 순국기념관을 찾고 있다는 점입니다. 일본의 몇몇 미션스쿨들이 수학여행 때 순국기념관 방문 일정을 넣습니다. 기념관에 와서야 선조들의 만행을 접하고 눈물 흘리는 아이들을 보면서 화해의 가능성을 엿봅니다. 일본의 위정자들이 이곳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 흘리는 날이 와야 합니다.” 최 목사는 이같이 말하며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를 촉구했다.

제암교회의 올해 표어는 ‘새로운 희년을 선포하라’다. 한·일 간의 앙금을 50년 안에 씻어내자는 바람을 담았다. 일본의 사과가 화해의 출발점이다. 이를 위해선 양국 교회의 교류가 활성화돼야 한다고 최 목사는 제안했다. 그는 1960년대 말 일본의 목회자들이 제암교회를 방문했던 일을 소개했다.

“그때 일본 기독교인들이 1000만엔의 성금을 모아 교회를 찾았습니다. 거금이었습니다. 교인들이 참회의 마음을 담아 성금을 모았다고 합니다. 절반은 유족에게 드렸고 나머지는 교회를 지었습니다. 그 자리에 지금의 순국기념관과 교회가 들어선 것입니다.” 최 목사는 이 같은 우정을 이어받아 양국 교회가 교류하는 꿈을 꾸고 있다.

강 원로목사도 거들었다. “일제강점기 때 제암리 교회는 일종의 해방 공간이었습니다. 워낙 시골이어서 가능했던 일이죠. 그때 담임이던 김교철 전도사는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사건과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라’는 내용이 나오는 본문을 갖고 주로 설교했어요. 용감했었죠. 그러니 교회에만 오면 독립과 해방이 손에 잡힐 듯했을 겁니다. 이런 설교를 들은 교인들은 광목 천에 태극기를 그려 장날마다 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그래서 일경이 교회로 찾아와 보복한 겁니다.”

3·1운동순국기념관에서 15일 열린 ‘4·15 제암리 학살사건 100주년 추모제’에 참석한 화성 월문초등학교 학생들이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있다.

강 목사는 신앙 선배들의 용기를 생각하면 지금도 숙연해진다고 했다. 그는 “우리도 순교자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아름다운 발자취를 남겨야 한다”면서 “선배들이 목숨 걸고 남긴 교훈이 우리의 다짐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화성=글·사진 장창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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