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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새벽에 불려가 꿇어앉은 천학비재(淺學菲才)에게 노스님이 내민 것은 큼지막하고 두툼한 한 권의 책(「이·렇·게·읽·었·다 - 설악 무산 조오현, 한글 선시」)이었다. “옜다. 거기 권영민 교수(전 서울대 국어국문학과)가 쓴 것을 찾아 읽어다오. 네 목소리로 들어봐야겠다. 젊은 놈이 읽어야 총기가 느껴지지 않겠냐.” 하지만 위엄에 처한 경황이라 글자는 눈에 들되 더듬더듬, 제대로 읊어대지 못했다. “그래, 됐다. 너를 보고자 한 내 심정이 그랬다.”

▼필자의 가슴에 새겨진 설악 무산 조오현 스님과의 마지막 장면이다. 생존해 계실 때 찾아뵙기를 그랬듯 조문도 여명조차 없는 꼭두새벽 달음으로 했다. 영정 속에서 지극한 웃음을 지어 보이던 그 표정에 입이 절로 열렸다. “그래. 저 순진무구한 해탈의 표정에 내가 이끌린 것이지.”

▼하심을 견지하셨던 스님께서 자작시 `내가 죽어 보는 날'을 소리보시로 들려준 기억이 생생하다. “부음을 받는 날은/ 내가 죽어 보는 날이다// 널 하나 짜서 그 속에 들어가 눈을 감고 죽은 이를/ 잠시 생각하다가/ 이날 평생 걸어왔던 그 길을/ 돌아보고 그 길에서 만났던 그 많은 사람/ 그 길에서 헤어졌던 그 많은 사람/ 나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 나에게 꽃을 던지는 사람/ 아직도 나를 따라다니는 사람/ 아직도 내 마음을 붙잡고 있는 사람/ 그 많은 얼굴들을 바라보다가// 화장장 아궁이와 푸른 연기/ 뼛가루도 뿌려본다.”

▼생전 인터뷰 때 `원효 스님의 말씀'이라며 들려준 말이 기억을 헤집고 나와 숙연하게 한다. “아무리 좋은 것도 본래 없었던 것만 못하느니라.” 하지만 결초보은(結草報恩)이다. 모레, 16일 조실 스님으로 주석했던 설악산 신흥사에서 1주기 추모법회가 열린다는 소식이다. 전야(15일)에는 내설악에 위치한 동국대만해마을 `문인의 집'에서 계간 `불교평론'이 주관하는 추모세미나가 진행된다. `설악무산, 그 흔적과 기억'을 대주제로 불학사상, 문학적 위치, 인간적 면모를 두루 조명한다니 시선이 절로 간다. 그 생의 궤적이 무진법문(無盡法文)이다.

용호선논설위원·yonghs@